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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은 은혜이고, 흐르게 하는 것은 사명이다.(롬 1:1-7)

바울의 이름에 담겨진 의미


로마서를 묵상하다 보면,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로마서를 통해서 복음의 큰 흐름을 깨닫게 되면, 어떤 이단을 만나더라도 쉽게 넘어가지 않습니다. 바울의 인생 목적은 복음에 있었습니다. 그런 바울의 생애를 보면서, 성도도 인생의 목적에 대한 묵상이 시도되어야 합니다. 인생이 올 때는 순서가 정해져서 오지만, 떠날 때는 순서와 무관합니다. 세상에 태어날 때는 ‘첫째, 둘째, 셋째’로 서열이 있지만, 떠날 때는 태어난 순서와 무관하게 세상을 떠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언제 어떻게 떠날지 모릅니다. 짧고 불안한 인생을 살면서 목적없는 삶을 산다면 불행일 것입니다.

 

자, 이제 로마서를 살펴보겠습니다. 롬 1:1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편지하면서 자기를 소개하는데, 이름을 ‘바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독일 튀빙겐 대학교의 신약학자 마르틴 헹엘은, 바울이 태어날 때부터 사울과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한 이후에, 이름을 바꾼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회심한 때로부터 13년 정도가 지나고 난 뒤부터 “바울”이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사용했다는 주장입니다. 그 이유는 “사울”이 유대식 이름이고, “바울”이 로마식 이름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의 유대 공동체에서는 “사울”이란 이름을 사용했고, 이방인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할 때는 “바울”이라는 로마식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사울”은 ‘묻다, 간구하다’란 뜻을 가진 히브리식 이름입니다. 바울은 ‘작은 자’라는 뜻을 가진 로마식 이름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울”이 이방인 선교를 수행할 때는 “바울”이란 이름을 사용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명자로 쓰임받을 때는 ‘작은 자’란 뜻의 “바울”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면 왜 바울은 자기를 ‘작은 자’라고 소개했을까요? 이것을 알려면, 이스라엘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을 쓴 사람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이 사무엘서에 나오는 “사울 왕”입니다. 사울은 유대인들의 의식 속에 ‘왕’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울 왕이 베냐민 지파 출신인데, 베냐민 지파 출신 중에서 가장 높이 올라간 사람이 사울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르게 보면,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실패한 왕이 사울입니다. “사울 왕”은 ‘간구하다, 묻다’라는 자기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을 버리고, 바울을 선택하다.


사도 바울도 베냐민 지파 출신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부모는 바울이 “사울 왕”처럼 높은 사람이 되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사울 왕”처럼 실패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묻고 구하는 사람이 되기도 원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 “사울”이란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이름이 본래 사울과 바울이었다고 하는 사람들은, 로마식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이방 선교에 유리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영적으로 확실히 깨달은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인간이란 연약한 존재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의지로는 하나님의 의로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사울 왕이 살았던 실패한 삶의 방식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울 왕”의 ‘이름과 삶의 방식’을 버린 것입니다.

 

사울 왕이 살았던 삶의 방식이 무엇이었습니까? 사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세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 자기 이름을 기념하는 기념탑을 세웁니다.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직접 제사를 집례하기도 합니다. 아말렉과 전투한 이후에는, 모든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라고 했는데, 자기가 보기에 좋은 짐승들을 살려놓습니다. 자기의 상식과 이성으로 판단해 보니까 짐승을 죽이는 게 아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과 판단을 따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상식과 이성에 맞지 않으면, 자기의 이성을 따랐던 것이 사울의 방식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사울”이란 이름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는 “바울”입니다. 즉 ‘작은 자’이기 때문에, ‘자기의 상식과 생각과 방법’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말씀을 의지하고, 말씀을 따를 수밖에 없는 ‘작은 자’로 살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자기를 소개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1절)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예수님의 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종”에 해당하는 헬라어 ‘둘로스’는 ‘노예’라는 뜻입니다. 당시 노예들은 수십 년을 한 집에서 봉사했어도, 다른 집으로 팔려가면 즉시 소속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종이 주인이 바뀌었다면, 새 주인의 심부름으로 다른 집에 갔을 때는 자기의 소속부터 밝혀야 했습니다. 그래야 그 집의 주인이 오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설명한 것은, 그런 시대적인 배경에서 한 말입니다. 즉, 자기는 주인이 바뀐 노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 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과거에 바울을 노예로 삼았던 다른 주인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 전에 누구의 종이었을까요? 바울은 롬 6장에서 그것을 말합니다. 롬 6:6절을 보면,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과거에는 죄의 종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는 죄에게 사로잡힌 죄의 노예였던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죄의 노예였으면, 사망의 권세 아래에 붙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악한 것에 쉽게 반응합니다. 악하고 부정적인 것에 쉽게 반응하고 빠르게 전염됩니다. 링컨의 어머니는 그가 어릴 때 종종 “부정적인 사람들과는 상종하지 마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세균과 같이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존재, 부정과 부패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존재, 악한 일이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존재, 물질이나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바울


바울의 과거가 그렇게 죄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소속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죄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서 가장 큰 기쁨은 “죄의 삯,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그것을 롬 8:1절과 2절에서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게 복음입니다. 그는 더 이상 죄와 사망에 붙잡여 있지 않는 존재, 그리스도의 자유와 생명에 사로잡힌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간이 자유롭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망에 붙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몸이 죽지 않으려고 하니까 먹고 사는 것에 집착을 합니다. 자존심과 명예가 죽지 않으려고 하니까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합니다. 마음이 죽지 않으려고 하니까 탐욕과 탐심을 추구합니다. 사망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기에 절망입니다. 어떤 사람은 몸이 죽는 것보다 자존심이 죽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존심보다 인생의 가치관이 죽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치관보다 소유가 죽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모든 믿는 자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죄와 사망에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가 성도인 것입니다. 오히려 죽음을 기뻐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바울의 인생을 생각해 보십시요. 그는 그리스도의 종이 됨으로써 물질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종에게는 물질에 대한 소유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유입니다. 바울은 소유권을 포기함으로써 물질에 대해서 자유한 자가 되었습니다. 권력과 명예에 대해서도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종에게는 명예와 권력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유입니다. 명예와 권력을 배설물처럼 포기함으로써, 바울은 명예와 권력으로부터 자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가난하다고 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행하다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재물이 부정하기 때문에, 죄로 여겨야 한다고 한 것도 아닙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 6:10)고 했지만, 돈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하는 탐심을 경고한 것입니다. 바울에게 물질이란 있으면 좋은 것이지만, 없어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 4:11절에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했습니다. 빌 4:12절에서는,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되면, 세상에 대해서는 자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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