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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는 세대는 부서지고 깨지는 정도가 다르다.(수 5:2-9)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자기 깨어짐을 경험해야 합니다.

“자기 깨어짐”은 신앙의 본질적인 가치이며 핵심적인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아가 부서져 나가야 하는데, 여전히 신앙생활에서 자아를 붙잡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 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두드린다”로 번역된 헬라어 ‘크로우오’가 히브리어 ‘나카’에 해당한다고 했습니다. ‘나카’라고 하면, ‘강하게 때린다, 깔아 뭉개다, 쳐부수다’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밖에서 여러분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는데, 문을 부숴뜨릴 정도로 때리신다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다고 했습니까? ‘자아’라는 마음 문이 너무 견고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이 쉽게 열리지 않기 때문 에, 부서질 정도로 세게 때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문이 부서져 나가야 합니다. 인생은 그런 의미에서, “나의 문이 부서지고, 나의 집이 무너져내리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인생에 대한 정의가 세상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이것을 받아들지 못하는 사람은 말씀과 부딪치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시련과 고난을 힘들어 합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하나님 제게 왜 이러세요?”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자아, 나의 집이” 무너져야 하는데, 그게 무너질까 붙잡고 노심초사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자기깨어짐을 경험했습니다.

요나서를 보면, 부서지지않는 자아와 씨름하는 요나의 모습이 나옵니다. 요나는 대단한 민족주의자이며, 고집도 세고, 성격도 독특합니다. 그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니느웨로 가서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니느웨가 앗수르의 수도인데, 당시에 앗수르가 제국으로 성장할 때입니다. 이때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도 강하게 성장하고 있었지만, 앗수르는 세계를 제패하면서 제국으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앗수르”가 어떤 존재였다는 뜻입니까? “저것만 없으면 행복하겠다”라는 존재입니다. “저것만 없어도 내가 평화롭겠다”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40일 뒤에 망할 것이다. 무너질 것이다. 심판받아 멸망할 것이다. 끝장 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나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그들에게 가서 회개시키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좋다가 말았습니다. 그래서 반대로 나갑니다. 요나는 “40일만 잘 숨어 있으면 이스라엘이 행복으로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40일만 지나면 앗수르가 멸망하고, 이스라엘의 염려와 두려움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니느웨와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탑니다. 그때 시련이 들어옵니다. 하나님이 엄청난 풍랑을 일으키시고, 요나는 바다에 던져집니다. 물고기 뱃 속에서 3일이나 머물게 하십니다. 욘 2장을 보면, 요나는 자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지옥 깊숙한 곳에 있는 줄 알고 회개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으시 고, 물고기가 육지에 토해내게 하십니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결국 니느웨에 가게 됩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엄중하신 분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명령대로 말씀을 전하긴 하지만 성의없이 말씀을 전했습니다. 여기서 “40일”, 조금 지나가서 “지나 면”, 다른 곳으로 좀더 가서 “니느웨가”, 그리고 저 멀리가서 “무너질거야”라는 식입니다. 그런데 니느웨 사람들의 모습이 기가 막힙니다. 통곡을 하면서 가축 들까지 금식을 하게 합니다. 왕도 말씀을 전해 듣고 재를 뒤집어쓴 채로 울면서 회개합니다. 그리고 욘 4:8절을 보면,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 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성령이 요나의 머리로 쏘아져 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머리를 “쪼였다”고 했습니다. 뜨거운 햇살과 뜨거운 바람이 요나의 머리를 ‘강하게 때렸다’는 것입니다. 강렬한 빛(즉, 진리의 빛)과 성령의 바람이 요나의 머리를 죽였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된다는 것은 성령님에 의해서 머리가 죽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입니다. 성도가 된다는 것은 “성령님에 의해서 머리가 죽어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포기, 자아의 죽음’을 말합니다. 그 다음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것은, 자기의 발 아래 에 놓여진 십자가를 일으켜 세우라는 뜻입니다. 십자가를 ‘고난과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십자가로 상징되는 “언약, 말씀”을 어디에 두고 삽니까? 자기 발 아래에 두고 삽니다. 매일 ‘언약도, 말 씀도, 복음도’ 발 아래 먼지처럼 여기면서 삽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영접한 성도가 되려면 어떻게 해 야 합니까? 십자가가 머리로 올라와야 합니다. 말씀이 머리로 올라와야 합니다. 자기의 생각, 자기의 머 리가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의 말씀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상식과 전통, 경험과 가치관의 머리가 성령에 의해서 죽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복음, 언약의 말씀이 올라와야 합니다.

     

출애굽 세대는 자기깨어짐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왜 출애굽 세대는 성공하는 세대가 되지 못하고 실패하는 세대가 되었습니까? “자기 깨어짐, 자기부서짐”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의 기적을 체험하고, 홍해를 건너고, 광야에서 연단받으면 서도, 자아가 부서져 나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는 세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체험은 했 지만, 깨지고 부서지지는 못한 것입니다. 엄청난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상태로 부서지고 깨지지 못했습니다. 애굽 의 옛 자아를 버려야 했는데, 여전히 옛 사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자기의 생각과 경험을 의지하면서, 환경과 처지에 굴복했습니다. 출애굽 세대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싸우신다”는 것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가나안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합니다. 믿음이 터져 나오지 않고, 원망이 터져 나왔 습니다. 그래서 실패한 세대가 되어 광야에서 죽음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 세대는 육신의 할례를 받았으나, 그것이 영적인 변화로 성숙되지 못했습니다. 모세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나안 세대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 10:16)고 당부한 것입니다. 가나안 세대는 모세의 말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직접적으로 유월절과 홍해 사건을 체험하지는 못했습니다. 시내산에서 유월절을 기념하는 수준에 그쳤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유월절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고,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의 의미를 새기고, 육신의 할례를 통해서 마음의 할례까지 받았던 것입니다.

     

보혈의 은혜가 있는 사람은 자기 깨어짐을 경험한 승리의 사람입니다.     

그러면, 유월절의 의미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보혈의 은혜”입니다. 신약의 언어로 말하 면,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유월절이란 ‘내가 죽었어야 할 자리에 어린 양의 보혈이 대신했다’는 것 입니다. 나를 대신해서 어린 양이 희생의 피를 흘린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죽음에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이 보혈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으로 순종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순종해야 합니다. 보혈의 은혜를 통해서,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빌 3:7-8)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은 옛 사람이었던 자기를 이야기합니다. “나는 8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이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고,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했 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 바울은 그렇게 이야기한 뒤에, 그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빌 3:8)고 했습니다. 보혈의 은혜를 알고 나니까 세상의 모든 것들이 배설물로 여겨진 것입니다. 은혜를 깨닫고 나니까 자 신이 먼지와 같은 존재인 것을 보았습니다. 사망의 죄인이 구주 예수님의 은혜로 생명된 것을 보았습니 다. 그러니까 다 배설물처럼 여기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있던 자리에, 말씀이 자리잡게 했습니다. 자아가 고집 부리던 자리를 말씀이 다스리게 했습니다. 성도가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재물의 맛, 명예의 맛, 물질의 맛, 출세와 성공의 맛이란 아무리 체험해도 허무하다는 것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교훈이지 않습니까?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생각과 상식, 자기 판단과 경험이 깨지고 부서져야 합니다. 자기를 추구하고, 자기를 의지하고, 자기를 만족시키려는 모든 자아가 깨지고 부서져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말씀이 자리를 잡게 해야 합니다. 말씀이 머물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승리!”가 여러분에게 따라붙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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