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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거칠 것이 없다.1(창 35:1-8)



창 33장과 34장에서 야곱의 가족이 머무는 장소가 세겜이라고 했다. 세겜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이다. 그런데 야곱이 하나님께 서원했던 장소와는 거리가 있다. 창 28장에서 야곱은 에서를 피해 밧단아람으로 갈 때,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그러니까 그가 다시 돌아오면, 벧엘로 돌아와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겠다고 했다. 그런데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돌아온 뒤에, 하나님과 약속했던 벧엘로 간 것이 아니라 세겜으로 간다. 거기서 제단을 쌓고 자기 신앙을 고백한 뒤에, 그 곳에서 10년을 산다.


창 33:19절을 보면, 야곱이 세겜 성읍의 땅을 백 크시타에 샀다고 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면, 자기 장막을 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야곱은 하나님이 주신 땅이 아니라 자기가 산 땅에서, 자기 힘으로 장막을 친 것이다. 은혜로 얻은 것이 아니라 자기 힘을 의지해서 산 땅이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야곱 가문의 비극인 디나의 사건은 여기에서 출발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오늘 여기서부터 출발하려고 한다. 야곱의 과실, 그로 인해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리고 뒤에 그것을 극복하는 야곱의 영적부흥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다.


1. 야곱의 가정에 일어난 비극이 무엇 때문인가?


야곱이 거주하던 세겜이라는 성읍의 특징을 알아야 한다. 디나를 욕보인 사람이 세겜인데, 성읍의 이름도 세겜이다. 그러니까 세겜이라는 하몰의 아들이 보여주는 영적인 상태가 세겜의 영적인 상태와 같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세겜이라는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세겜은 디나를 보고서 하면 안 되는 일을 저질렀다. 하나님을 의식한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자기 욕망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이것이 세겜의 상태, 세상의 상태이다. 세상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 욕망에 따라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산다. 이것이 세겜이라는 세상이다.


결국 야곱의 안목이라는 것이 어떤 상태가 되었다는 뜻인가? 그는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각성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세속적인 안목까지 버리지는 못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땅, 그저 편하게 살 수 있고 자기 욕망에 따라서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는 세상을 좋아하는 수준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뿐이 아니다. 세겜이라는 세상의 정체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디나가 욕을 당하자 누가 복수를 하는가? 디나의 친오빠인 시므온과 레위가 야곱을 대신하고 나선다. 그들이 세겜 족속들에게 할례를 받으면 누이 동생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래서 모두 할례를 행했는데, 그 때 둘이 칼을 들고 가서 세겜 족속을 모두 죽여 버린다. 이 행동은 두 가지 의미에서 굉장히 사악한 일이었다.


하나는, 그들이 가나안이라는 축복의 땅을 저주의 땅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의 땅이다. 그런데 시므온과 레위가 그 축복의 땅을 저주의 땅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심판을 유보하시면서 죄악이 관영할 때까지 기다리시는데 그렇게 했다. 시므온과 레위는 자기들의 혈기로 하나님보다 앞서서 행동한 것이다.


또 하나의 잘못은 창 17장의 언약을 깨뜨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할례를 받으면, 이방인이나 누구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셨다. 이 언약을 시므온과 레위가 악용한다. 거룩한 할례를 아무한테나 받으라고 한 것도 잘못이지만, 비록 나쁜 인간들이라도 할례를 행했으면 하나님의 백성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을 죽이면 안 되는데,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을 이용해서 살인을 저지른다. 그러니까 세겜 땅을 선택한 결과가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까지 파기해 버린 것이 되어 버렸다. 그로 인해서 최종적으로는 세겜의 또다른 부족 동맹들에 의해서 야곱 가족이 몰살 당할 두려움과 공포에 빠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세겜을 선택한 야곱 공동체의 과실로 나타난 결과이다.


은혜가 아니라 자기의 노력으로 풍요와 성공을 위해서 선택한 땅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간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안목으로 선택한 땅이었다. 거기서 야곱의 가족들은 디나가 보여주듯이 거룩함을 상실해 버린다. 통혼을 하자고 제안받은 것처럼, 하나님께 받은 비전을 상실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시므온과 레위가 보여주듯이 하나님과 맺은 약속과 언약까지 상실하게 되고, 자기가 추구했던 세상으로부터 공격당하고 몰살당할 위기에 몰리게 된다.


2. 야곱의 가정이 영적으로 무너진 이유가 무엇인가?


이처럼 야곱의 가정이 영적으로 무너지게 된 가장 큰 원인은 하나님 중심의 믿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것을 창 35:2절에서 알려주고 있다. 창 35:2절,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야곱이 자기 집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방 신상들을 버리라고 말한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본문을 뒤집어서 읽으면, 야곱의 가정에 이방 신상들이 들어와서 자리를 잡았다는 말이다. 우상이 그들의 가정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았다. 우상이 들어와서 “오직 하나님께로만 향한” 하나님 중심성이 상실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야곱의 가정에 영적인 위기를 가져온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 때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이 창 35:1절 말씀이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두려움에 떨고 있을 야곱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성경의 다른 곳 같으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야곱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너는 강하고 담대해라. 내가 너를 지켜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위기 앞에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들려주신 말씀은 “내가 너를 도와와주겠다”는 말씀이 아니었다. “내가 너를 구원하겠다”는 말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명령이었고, 그 명령은 너무도 분명하고 확실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라”는 명령이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일어나라”고 하셨다. 어두운 곳에서 일어나라는 말이다. 영적 침체로부터 일어나라는 말이다. 자녀들에 대한 원망과 두려움으로부터 일어나라는 말이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의 삶에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일어나라”고 말씀하신다. 깊은 탄식과 슬픔으로부터 일어나라고 말한다. 분노와 저주로부터 일어나라고 말한다. 그리고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령하신다. 이 벧엘은 야곱이 하나님과 처음 만났던 곳이다. 본문 7절을 보라.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하나님은 야곱이 세겜 사람들로부터 떠나서, 처음 하나님과 만났던 은혜를 기억하기 바라셨다. 이것이 중요하다. 우리도 주님과 처음 만났던 때를 기억하며 살면 문제가 없다. 첫 구원의 은혜와 감격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힘들지만, 어렵고 힘들 때마다 십자가의 감격이 회복되기만 하면 능력있는 성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저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세겜적인 요소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주님이 여러분에게 ‘세겜을 떠나라’고 말씀하실 때 “일어나 벧엘로 향하는” 분들이 되시기 바란다. 구원의 감격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하나님 중심성을 지키며, 은혜의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3. 부흥이 일어난 사람에게는 은혜가 따라온다.


창 35:2절에서, 야곱은 말씀을 통해 세 가지 명령을 내린다. 그것은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는 명령이다. 그리고 3절에서 옛 신앙의 부흥을 도모한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이것이 야곱에게 일어난 영적 부흥이다. 오늘 여러분의 삶과 가정에도 이와 같은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게 되기를 바란다.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런 역사가 발흥하지 않는다. “전도를 하자, 기도를 하자”고 해도 영적인 부흥 없이는 기쁨이 없고 의무만 있게 된다. 나의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해야 할 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좋은 것을 말해도, 내 안에 영적인 감동이 없으면 그것이 바로 죽은 믿음이다. 그러나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게 되면 모든 것이 기쁨으로 충만하고, 두려움 없이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꼭 믿으시기 바란다.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면 은혜는 저절로 따라온다. 모든 문제들이 은혜 위에 덮이게 된다. 우리 삶에 문제가 있더라도, 문제가 무엇이고 그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은혜 안에서 살면, 우리 주님이 모든 문제를 맡아서 고쳐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5-6절 말씀을 주의 깊게 읽어보시기 바란다.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야곱의 가족들에게 적대자가 없어서 그들이 무사히 벧엘에 도착했던 것이 아니다. 야곱을 쫓아가려는 사람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무사히 벧엘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부흥이 시작된 사람에게는 거칠 것이 없다. 하나님이 지키시기 때문이다.


성도의 삶이라고 대적자가 없는 것이 아니다. 마귀는 언제나 우리에게 도전하고, 우리를 공격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성도는 마귀의 대적을 물리칠 수 있다. 성도는 문제 때문에 낙심하고 슬퍼하는 사람이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삶에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 그가 곧 다수이다.”라고 말한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세상이 건드릴 수 없는 능력자가 된다.


물론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고, 쉽게 죄에 빠지고 물들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과 믿음 안에 있으면, 하나님은 성도를 지켜주신다. 성도는 그런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성도의 삶에서 필요한 것은 불평이 아니라 믿음이다. 우리는 감옥 속의 바울과 실라가 그랬던 것처럼, 감옥과 같은 어둠 속에서도 찬송하는 믿음을 보여야 한다. 굳건한 믿음 앞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그러니까 성도는 당면한 문제보다 하나님을 더 많이 보아야 한다. 그러면 은혜가 넘치게 되어서 모든 부정적인 것을 은혜로 덮어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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