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필요한 시험, 피해야 하는 시험



필요한 시험, 피해야 하는 시험(마 6:9-13)


오늘 우리는 주기도문에 대해서 12번째로 말씀을 나누게 된다. 그 중에 오늘 말씀은 시험에 관한 내용이다. 마 6:13절,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여기서 ‘시험’이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페이라스몬’인데, ‘페이라조’라는 단어에서 출발한다. ‘페이라조’라고 하면 ‘시도하다, 검사하다’는 뜻도 있고, ‘시험하다’는 뜻도 있다. 그런데 페이라조는 어떤 과정을 테스트하는 시험이라기보다 ‘유혹하는 것’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이 시험은 사람을 유혹하는 시험이며, 넘어뜨리기 위해서 하는 시험이다. 성경은 이 시험을 일으키는 주체도 거의 마귀라고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가셨는데, 예수님이 마귀에게 당하신 시험이 페이라조이다. 유혹해서 넘어뜨리기 위한 시험이다. 오늘은 이 시험이라는 한 단어와 앞서 읽은 구절에 대한 이해를 나누려고 한다. 이를 통해서 성도에게 필요한 시험이 무엇이고 피해야 할 시험이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한다.


1. 첫째, 성도가 받아야 하는 필요한 시험이 있다.


사람을 유혹해서 넘어뜨리려는 페이라조와 다르게 ‘시험하다, 검증하다’는 의미의 단어인 ‘도키마조’가 있다. 도키마조라고 하면, 확증하기 위한 시험을 뜻한다. 고후 13:5절에 보면,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했다. 여기서 ‘시험’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도키마조’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망하게 하려는 시험, ‘페이라조’를 하시지 않는다. 약 1:13절에 보면,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여기서 ‘시험‘이라는 단어가 ‘페이라조’에 해당하는 말들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페이라조’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유혹하고 시험하는 것은 ‘사탄, 마귀’이다.


그러나 우리 믿음을 확증하게 하시려는 시험, ‘도키마조’를 치르게 하실 때가 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시려고 이끄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잃어버린 양의 상태”로 몰아가실 때가 있다. 그것을 위해서 도키마조를 사용하신다. 그래서 시련과 환난, 역경과 고난을 통해서 ‘참된 진리가 예수님밖에 없구나!’라는 진리를 깨닫게 하신다.


바울은 고후 13:5절에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성도는 시련과 환난을 당할 때에도, 자기 안에 예수님이 계신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그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면 “버림 받은 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을 영어 성경(NIV)은 “You fail the test.”로 번역했다. 헬라어로 ‘아도키모이’라는 이 말은 ‘시험에 떨어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실재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시험에 실패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성도는 언제라도 믿음의 시험에 직면하게 된다. 환난과 역경이라는 시험, 유혹과 핍박이라는 시험에 직면하게 된다. 그렇게 시험당할 때, 우리 안에 누가 계신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지 아닌지는 그 때 결정된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신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면 우리는 시험에 성공하는 사람이 된다. 반면에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신 것을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면 시험에 실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시려는 ‘도키마조’는 얼마든지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을 통해서 자기의 위치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선 믿음이라면 시험당할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믿음이라면, 자아가 부서져 나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자기의 노력과 에고가 부서져 나간다. 자기 힘으로 살아보려고 했던 노력들이 부서져 나간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려지게 된다. 그때 신자는 비로소 자기 믿음의 위치를 깨닫고 회개하는 자리로 나가게 된다.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과 가까운 자리까지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2. 둘째, 피해야 하는 시험으로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


누구나 성령충만을 경험하면 곧바로 시험을 만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은혜받은 뒤에 마귀가 역사하는 것이다. 부흥회에서 은혜를 충만하게 받으면 돌아가는 길에 시험에 빠질 때가 있다. 수련회나 새벽기도회에서 은혜받고 나면 은혜를 쏟아 부을 만한 사건이 일어난다. 사람 때문에 그렇게 되기도 하고, 재물 때문에 그렇게 되기도 한다. 건강 때문에 그렇게 되기도 하고, 답답한 현실이나 환경 때문에 그렇게 되기도 한다.


예수님의 경우에도 시험을 받으셨다. 그 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지만 ‘페이라조’를 당하셨다. 눅 4:1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예수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 그러나 곧바로 광야에서 시험이 시작된다. 성령충만해지면 시험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해이다.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면 거기에 따라오는 시험이 있다. 유혹이 있고 박해가 있고 환난이나 곤고함이 따라서 온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셨다. 거기서 돌아오셨는데, 마귀가 은혜의 배후에서 역사하며 성령과 은혜를 방해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시험이 들어왔을 때, 우리가 마귀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마 6:13)라고 기도하게 하셨다. 여기서 “들게 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세넹케스’는 ‘안으로 인도하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우리를 ‘페이라조’라는 시험 안으로 인도하지 마시옵고”라는 뜻이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은 사람을 ‘페이라조’ 하시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 말은 하나님께서 마치 ‘페이라조’ 하시는 것처럼 들려진다. 이것은 그런 뜻이 아니다. 우리가 시련과 환난에 빠지게 될 때, ‘도키마조’의 시험에 들어가게 될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마귀의 영역 바깥에서 마귀와 싸워 승리할 수도 있고, 마귀에게 사로잡혀서 마귀의 영역으로 끌려갈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 우리를 지키고 보호해 달라는 기도이다. ‘하나님, 우리를 시험에 빠져들게 하지 마옵소서. 우리가 마귀의 영역 안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마옵소서. 지독한 시련과 환난이 오더라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의심하지 말게 하소서. 믿음으로 이기게 하소서’ 이런 기도인 것이다. 이것이 이해가 되어야 한다.


3. 셋째, 그러면 어떻게 시험에서 승리할 수 있는가?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당하신 것과 다르게 사람들은 자기로 인해서 시험에 빠진다. 약 1:13-14절에 보면,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다. 시험, 즉 ‘페이라조’를 받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라는 것이다. 마귀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시험이라는 것을 집어넣는다는 것인가? 사람의 “욕심”에다 시험을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자기를 만족시키려는 열망, 자기 안에 무엇인가를 채우려는 뜨거운 마음이 욕심이다. 자기 안에 하나님이 들어와서 주인이 되어야 하는데, 자기가 무엇인가를 채우려고 할 때 시험이 온다. 마귀가 틈을 노리고 유혹해서 넘어뜨리려고 한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런 것을 경계하라고 했다. 그러니까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는 기도는, 궁극적으로 “내가 나를 추구하지 않도록 다스려 달라”는 기도이기도 하다. 내가 나를 추구하면 시험에 빠지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나를 향하는 열망이 아니라 내 안에 하나님이 오시기를 열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시험을 물리칠 수 있을까? 눅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실 때 누구의 이끌림을 받았나? “성령”이다. 예수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시면서 시험을 물리치신다. 그 다음에 무엇으로 시험을 물리치셨나? “말씀”이다. 말씀으로 시험을 물리치신다. 그리고 눅 4:2절을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온다.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예수님께서 금식을 하셨다는 말씀이다. 금식을 설명할 때, 우리가 궁극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기도”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금식하시면서 기도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님과 동행하시면서 승리해 나가셨다. 예수님 안에는 말씀이 충만하셨고, 예수님은 하나님께 끊임없이 기도하셨다. 우리도 성령과 말씀과 기도로 시험을 물리쳐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도록 구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성령과 말씀과 기도의 삶으로 이끌어 주신다. 성도란 이런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