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이 축복이 될 때가 있다(창 32:22-31)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야곱의 생애에서 가장 위대했던 순간 중에 하나와 만나고 있다. 야곱은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을 하면서 변화된다. 그토록 자아가 강해던 야곱, 자신의 힘과 능력에 의존했던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면서 내면의 변화를 체험한다. 천사와 씨름하면서 허벅지 관절이 부러져 나가고, 그의 단단했던 내면도 부서져 나간다. 그는 천사를 붙들고 울면서 간구했다. 그 눈물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의 고백이었고, 하나님은 그것을 인정해 주신다.
여러분, 이 얍복강 가에서의 씨름이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는 것일까? 오늘 세 가지로 말씀을 전하면서 은혜를 나누고, 기도 제목을 삼으려고 한다.
1. 인생은 어두운 곳에 홀로 있어야 할 때가 있다.
얍복강 가에서 있었던 야곱과 천사의 씨름은, 야곱이 밤에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22절,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한 밤중에, 야곱은 자기의 가족들과 모든 소유를 얍복 나루로 건너게 했다. 그리고 24절,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야곱은 홀로 얍복강 가에 남아 있었다. 여기서 “한 밤중”이라는 것과 “홀로 남았다”는 것은 인간 실존의 밑바닥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사람들이 흔히 인생을 “낮과 밤”으로 표현할 때 낮은 세상에서 잘 나갈 때이고,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를 표현한다. 즐겁고 바쁘고 찬란한 것을 경험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한 밤중”은 환난이나 시련과 같은 시간을 뜻한다. “한 밤중”이라는 시간은 절망과 고통, 외로움과 두려움을 표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잘 나갈 때는 인생의 진짜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자기에게 세상이 미소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가 언제 진짜 인생의 얼굴을 보게 되는가? 위기와 만났을 때이다. 고난과 역경을 만났을 때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던 일종의 기대감, 사람에 대한 기대감 같은 것들이 무너져 내릴 때이다. ‘나의 기대감, 사람에 대한 기대가 본래 아무 것도 아니구나’ 그것을 깨닫게 될 때이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또한 놀라운 역설이 있다.
그 역설이란 혼자있는 고독감이나 외로움 속에서 ‘한 밤중’이라는 인생의 진짜 얼굴을 보는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빛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24절을 기억해 보면, 야곱은 혼자 남게 되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야곱에게 씨름을 걸었다. 야곱은 한 것이 없다. 그저 깊은 밤중에 혼자가 되었다는 인생의 허망함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다가 온 것이다. 자기가 그에게 다가간 것이 아니라, 그가 야곱에게 다가온 것이다.
이 맥락이 정말 중요하다. 이것이야 말로 기독교 복음의 참된 가치라는 것을 아셔야 한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 없는 인생이 외로운 밤이고, 두려운 밤이고, 절망과 낙심의 밤이라는 것을 깨달은 겸비한 마음에 은혜의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러니까 성도란 인생에서 고독감, 절망감, 어둡고 두려운 현실을 느낄 때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그 인생의 어두운 밤이 사실은 은혜의 통로가 된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2.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에서 복을 찾고 구해야 한다.
천사가 야곱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창 32:27) 히브리적인 사고 패턴을 따라가면, 이름이란 존재를 규정한다. 그러므로 이 질문을 바꾸어 말하면 “너는 누구냐?”라는 것이 된다. 이에 대한 야곱의 대답이 무엇이었나? “너는 누구냐? 네 존재가 무엇이냐?” 이에 야곱이 대답했다. “야곱이니이다”(27절) 야곱의 이름 속에는 무엇이 담겨 있나? 거기에는 야곱이라는 인물이 살아온 삶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야곱은 “발뒤꿈치를 잡은 자, 속이는 자”라는 뜻을 담고 있다.
야곱이 어떤 사람이었나? 형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나온 사람이다. 형이 가야 했던 축복의 길을 붙잡아서, 자기 것으로 속여서 빼앗은 사람이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고, 외삼촌 라반도 속여 넘겼다. 이때까지 자기의 육체와 생각을 가지고 속이는 사람의 인생을 살았다.
천사가 다시 야곱에게 말했다. “28절,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우리는 지금 너무도 중요한 대목에 이르고 있다. 하나님은 야곱의 존재 기반이 되는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새로운 이름으로 존재를 바꾸라고 하신다. 그의 이름이 이제는 야곱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이제 자기의 힘을 믿고 사는 사람, 세상적인 기준을 가지고 남을 속이고 사기치고 빼앗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는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상당히 복잡하고 미묘한 단어가 우리 앞에 와 있다. 이스라엘은 ‘사라’와 ‘엘’(하나님)이라는 두 개의 히브리 단어로 합쳐진 말인데, ‘사라’는 ‘겨루다, 싸우다, 주도하다, 통치하다’는 뜻이 있다. 그런데 뒤에 이어지는 말씀, 즉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28절) 때문에 우리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과 겨루어 싸울 수가 없고, 또한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길 수도 없다. 그래서 옥스퍼드 주석에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과 함께(with) 싸운 자, 즉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싸운 자’로 이해하도록 한다. 야곱은 이때까지 자기의 생각과 힘으로 홀로 인생과 싸워왔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과 함께 싸워가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의미가 있는 해석이지만, 우리는 여기에 만족하면 안 된다. 우리는 이보다 조금 더 나가야 한다. 28절에서 “이겼음이니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핫투칼’은 원형이 ‘야칼’인데, 이 단어는 ‘능력이 있다, 우세하다’란 뜻이다. 그러니까 28절은 야곱이 하나님과 사람들을 이겼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능력을 나타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야곱은 어떤 능력을 나타낸 것일까? 여기서 이 대목이 중요하다.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책이 70인역(LXX)이라고 했다. 거기에서 히브리어 ‘야콜’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 ‘뒤나토스’란 단어로 번역했다. 뒤나토스는 ‘권세, 권능’이란 뜻을 가진 단어 ‘뒤나미스’의 형용사형이다. 뒤나미스라는 단어에서 ‘다이너마이트’라는 말이 나왔다고 했다.
뒤나미스가 담고 있는 ‘권세, 권능’이란 뜻은 주로 내적으로 충만해지는 능력을 말한다고 했다. 이것은 바깥에서 일어나는 능력이 아니라다. 예를 들면 기적과 이사가 나타나는 그런 능력이 아니다. ‘뒤나미스’는 오히려 우리 안으로 흘러 들어와서 우리를 충만하게 하는 능력이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진리의 말씀을 주시는데, 이 말씀이 내 안에서 충만해지는 것이다. 나에게 말씀이 있고 진리가 있는데, 그것이 충만해져서 흘러넘치는 것이다. 충만해지니까 흘러넘치게 되는 것, 바로 그것이 뒤나미스이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부터 출발을 시작해야 한다. 야곱의 내면에 무엇인가로 충만해졌다. 그것이 능력으로 나타났다. 무엇이 충만해 졌다는 것이다. 이전까지 야곱의 내면에는 자기의 생각과 방법, 자기의 노력과 열심이 가득했다. 그런데 그것이 얍복강 가에서 모조리 부서져 나갔다. 천사와 씨름하면서, 도무지 자기의 힘으로 인생의 외로운 밤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 스스로 아무리 노력해도, 외로움이나 두려움과 싸워서 승부를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그의 내면에 무엇이 채워지게 되었나? 자기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더 이상 자기를 의지하고 사는 것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달은 것이다. 26절,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바로 이것이다. 히브리어로 ‘베라크타니’, 야곱은 지금 하나님에게 ‘바라크, 즉 복’을 구하고 있다. 바라크는 모든 생명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주시는 생명같은 복이다. 그러니까 지금 야곱은 하나님께 근원적인 복을 구하고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야곱은 지금 자기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다스리시도록, 자기를 내어 드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야곱의 내면에서 나타나고 흘러넘치는 능력이 되었다. 야곱은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셨다. 그래서 이제는 야곱이 아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인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의미이다.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다. 하나님의 지배를 허용한다.’는 의미이다.
오늘 말씀에서 여러분이 바로 이것을 붙잡으시기 바란다. 자기의 자아가 욕망하는 탐심에 지배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서 주님이 주시려는 약속과 소망을 붙잡고 승리하시기 바란다.
3. 결핍이 축복이 될 때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야곱은 오직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되도록 규정받았다. 이전까지 야곱은 온갖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기로 각성한다. 모든 본능적인 집착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겠다는 자기 결심을 하게 된다. 결국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고 놓지 않겠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저는 끝까지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있는 사람, 하나님만 붙잡고 사는 사람, 하나님만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성도란 이렇게 자기를 의지하던 자아의 작동을 멈추고, 하나님의 온전하고도 완전하신 다스림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의 다스림 안으로 들어갈 때 진정한 복이 임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야곱은 이제 남은 인생을, 다리를 절면서 살아가야 했다. 31절,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그러나 야곱의 마음은 평화로웠다. 지독한 씨름이 끝나고 나서, 브니엘을 지나는데, 먼동이 터오는 것을 보았다. 그가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평안을 누렸을까? 예전에 어떤 영화를 보면, 밤새도록 주인공과 악당이 싸운다. 그리고 싸움이 다 끝나고 난 뒤에 주인공이 평화를 얻었을 때, 태양이 떠올라서 그를 비추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먼동이 떠오르고 평화를 누리게 된 것이다.
야곱의 스토리가 지금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밤새도록 지독한 씨름을 했다. 그 씨름을 하면서 자기의 건강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지금, 야곱의 마음을 말할 수 없는 평화를 누리고 있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이 한 구절에 야곱의 마음이 다 녹아 있다. 어떻게 야곱이 평화를 누릴 수 있는가? 그가 자기의 생애를 하나님께 완전히 의탁했기 때문이다. 맡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기 건강에 문제가 생겼지만, 다리뼈가 부러지는 결핍이 생겼지만, 오히려 마음은 한 없이 평안했다. 맡기니까 평안해진 것이다.
야곱이 그것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자기 인생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기로 결정하니까, 자기에게 찾아온 결핍이 오히려 축복이 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자기의 약점이 오히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는 은혜의 통로가 된다는 것을 신뢰하게 되었다.
여러분, 결핍이 축복이 될 때가 있다는 사실을 알 때, 진정한 의미에서 평화가 찾아온다. 성도란 많은 것을 소유했기 때문에 평안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기 때문에 평안한 것이다. 성도는 이 믿음의 진리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성도는 언제나 이런 믿음과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것이 성도의 삶이고 능력이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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