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심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고후 7:2-10)


오늘은 종려주일이다.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셔야 할 고난의 길이 시작된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 주었다. 요 12:13절을 보면,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고 했다.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예수님을 맞이했다. 종려나무는 광야에서 자라는데, 도끼로 베거나 불로 태워도 다시 싹이 자라난다.

종려나무의 학명인 ‘피닉스 닥틸리페라’는 ‘피닉스, 곧 불사조와 같은 나무’라는 뜻이라고 했다. 이 나무는 다 베고 남은 그루터기를 불에 태워도 그루터기에서 다시 싹이 나서 자란다. 이런 종려나무의 특징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종려나무는 “승리와 부활, 영구적인 번영과 풍요”를 상징했다. 종려나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승리하게 하시며 구원하신다는 약속의 표시였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약속된 승리를 보려고 했던 것이다.

계 7장에 보면, 큰 무리가 하나님 보좌 앞에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이렇게 외친다. 계 7:10절,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그들이 외치는 고백이 무엇이냐면,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다”는 것이다. 구원이 누구에게서 나오는 것인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과 어린 양 되신 예수님으로부터 온다고 했다. 이런 고백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마지막 때에 가서도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 수 있는 것이다.

성도란 이런 믿음으로 모든 상황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 그런데 구원하심이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힘 주시는 분인 것도 믿어야 한다. 위로와 소망을 통해서 낙심한 자에게 기쁨을 주시는 분인 것을 믿어야 한다. 오늘은 그런 하나님의 위로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1. 낙심 중에도 하나님의 위로를 발견하라.

본문에서 바울은 교인들에게 마음을 넓게 가지고 자기를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기를 변호하는데, 그것이 2절 말씀이다.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생각해 보라. 바울은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았고, 해롭게 하지 않았고, 속여서 빼앗은 일이 없다고 했다. 하나님을 신앙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거나 부정한 일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환난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얼마나 억울할 만한 상황인가?

그럴 때가 있다. 아무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 억울한 일이 일어날 수가 있다. 열심히 살고 있는데, 뜬금없는 환난과 역경이 찾아올 수가 있다. 예수님도 그러셨다. 마가복음 14장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장면이 나온다. 그 중에 막 14:55절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라고 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아서 죽이려고 하는데, 증거를 얻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그만큼 깨끗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핍박하고 조롱했던 것이 세상이다.

이미 예수님은 이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요 15:18-19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세상이 미워한다고 했는데, 여기에 사용된 ‘미세이’라는 헬라어는 단순하게 ‘그냥 미워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보다는 ‘미워하고 박해한다’는 아주 적극적인 의미를 가진다.

세상이 성도들을 그렇게 대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성도들을 미워하고 조롱하고 박해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마귀가 배후에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상에서 억울하게 생각되는 환난과 역경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위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4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여기서 “가득하다”와 “넘치는도다”라는 동사는 원문에서 모두 수동태로 되어 있다. 바울이 하나님에 의해서 가득한 위로를 받았고, 동시에 넘치는 기쁨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넘치는도다”라는 말이 헬라어로 ‘휘페르페릿슈오마이’인데, ‘흘러넘치게 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기쁨이 계속해서 흘러넘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가 무엇 가운데서 그렇게 가득한 위로와 흘러넘치는 기쁨을 얻게 되었는가? 사도는 “모든 영광과 승리” 가운데서 라고 말하지 않았다. 바울은 오히려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라고 말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환난 중에라도 성도로 하여금 이겨낼 수 있는 ‘위로의 씨앗‘과 ‘기쁨의 열매’를 허락해 주신다. 그러니까 성도란 그렇게 환난 중에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기쁨을 발견하고, 체험하고, 누릴 수 있어야 한다.

2.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에서 힘을 얻으라.

하나님께서는 지극한 환난을 겪는 중에라도 우리에게 위로자를 보내셔서 만져 주신다.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는 정말 대단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필요한 모든 것을 동원하셔서, 우리를 만져 주시는 것이다. 사람을 보내서 위로하시기도 하고, 환경을 조성해서 위로하시기도 한다.

본문에서 바울은 디도를 통해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했다.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던 디도가 교회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전해 주었기 때문이다. 사도는 6절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여기서 “낙심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페이누스’는 흥미로운 단어이다. 이것은 ‘신분이 낮아진 상태’, 즉 ‘비천한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또한 ‘굴욕당한’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삶에서 실패를 경험한 사람, 지위가 추락한 사람, 굴욕을 당하고 있는 사람을 위로하신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실패를 경험하거나 자기의 지위가 추락했을 때 낙심한다. 누군가에게 억울하게 굴욕을 당했을 때 낙심한다. 또 자기가 생각했던 위치나 상태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낙심한다. 그런 모든 낙심할 만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위로자가 되신다. 바울은 디도를 통해서, 그런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배척당했다. 자신이 개척자였지만 그런 굴욕감과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고린도의 성도들 때문에 눈물을 많이 흘렸다. 그런데 디도를 통해서, 고린도의 교인들이 바울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바울에게 지은 잘못을 회개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바울을 열심히 변호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것이 바울에게 위로가 되고 더욱 큰 기쁨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다. 하나님은 고난이 끝난 뒤에 반드시 기쁨의 면류관을 허락하신다. 성도가 곤란한 지경에 처했을 때, 돕는 사람이나 돕는 손길을 통해서 그렇게 하신다. 그래서 고난 중에도 위로를 받게 하시고, 기쁨의 은혜를 더해 주신다. 바울에게는 디도를, 룻에게는 보아스를, 다윗에게는 요나단을 붙여주셔서 위로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그렇게 성도를 위로하면서 우리 인생을 돌보시는 분이다.

3. 작은 위로에서라도 큰 기쁨을 기대하며 승리하라.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물질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관계를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건강을 잃어버릴 때가 있고, 어떤 사람은 지위를 잃어버릴 때가 있다. 어떤 사람은 신뢰를 잃어버리고, 어떤 사람은 사랑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기보다 ‘무엇이 내게 남아 있는가’를 생각할 줄 아는 것이 성도이다. 하나님이 여전히 내게 남겨 놓으신 것이 있다. 그 남겨진 것에 불을 붙이셔서 다시 기쁨을 회복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까 성도는 남아있는 것에서 소망을 발견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홍수가 끝나고 노아가 방주에서 비둘기를 날렸을 때이다. 하나님은 세상에 정말 크고 작은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런데 노아가 비둘기를 날렸던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노아를 위로하신 도구가 무엇이었던가? 작은 나뭇잎 하나였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작은 나뭇잎 하나로 위로를 전하셨다. 인류 역사에서 작은 나뭇잎 하나가 그렇게 큰 기쁨을 주었던 적이 없을 것이다. 오늘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작은 나뭇잎을 발견하실 수 있기 바란다.

큰 기쁨의 조건을 발견하면서 살아가는 것도 능력이지만, 작은 나뭇잎을 통해서 주님의 위로를 발견하는 것은 더 큰 믿음의 능력이다. 믿음으로 그것을 발견하게 되면, 하나님과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홍수와 같은 커다란 두려움이 있더라도, 작은 나뭇잎이 보이면 큰 기쁨과 위로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도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위로의 손길을 발견하면서 승리하시기 바란다.

우리가 하는 근심은 세상이 하는 근심과 다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근심은 믿음을 성장시키기 위한 근심이다. 고린도 교회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고, 바울에게도 사도직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공격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이 바울이나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근심이 되었지만, 결국은 이런 과정을 통해 그들이 회개하고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겪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근심에도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10절,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근심을 입에 물고 있는 사람은 빨리 뱉어내야 한다. 그런 근심을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단이 주는 근심이고, 그 결과는 죽음이라고 했다. 여러분이 해야 하는 근심은 그런 근심이 아니다. 내일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고난만 바라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통해서,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 거기에 모든 해답이 있다. 고난과 시련이 있지만, 주님이 함께 하시면 부활의 영광을 체험하게 된다. 성도는 거기까지 가야 한다. 고난 뒤에 있을 부활의 영광, 여러분이 그것을 기대하시면서 믿음으로 승리하시기 바란다. 신앙의 성패는 누가 하나님을 더 확실히 의지하고 붙잡느냐에 달려 있다.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며 성별된 가치관을 가지고 살 때,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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