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고난도 인생도 하나님을 아는 크기만큼 보여진다.



고난도 인생도 하나님을 아는 크기만큼 보인다.(창 26:1-11)


성도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패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에 대해서 이해하고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고난과 연단의 섭리를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성도는 하나님에 대해서 온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분별하게 된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의 위엄과 비교해보기 전에는 결코 자신의 비천한 상태를 인식할 수 없다.”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을 때, 성도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말씀과 명령에 따라갈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을 신뢰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만큼 역사하신다. 내가 허용하는 만큼, 내가 주님을 인정하는 만큼, 주님이 우리 안에 뿌리를 내리신다. 그러니까 성도는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지식에 도달해야 한다. 오늘은 그것을 주제로 이야기하려고 한다.


1.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야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다.


오늘 말씀에는 아브라함이 겪었던 두 가지 시험이 이삭에게 들어가고 있다. 그 하나가 흉년에 관한 시험이었다. 1절,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하나님은 애굽에 내려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땅에서 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랄 땅에 머물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까지 하셨다. 이 대목에서 그는 인생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깨닫는다.


그러니까 그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왔을 때, 이삭은 말씀에 따라서 행동한다. 5절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이어진 다음에 6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삭이 그랄에 거주하였더니” 여기서 “거주하였더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와예쉡”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거주하였다’는 뜻이다. 이삭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즉각적으로 그렇게 반응했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말씀이 들어왔을 때, 말씀에 곧바로 반응하는 것도 축복이다. 특히 고난당하는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추구한다는 것은 더욱 큰 축복이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진실하시고, 사랑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가능하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일에 진실하신 분이다.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다. 그렇게 진실하신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신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을 기억해 보라. 요 13:1절에 보면,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했다.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도 영원하고 변함이 없다. 처음과 끝이 한결같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성도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삶을 온전하게 이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런 사랑을 신뢰하면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능력을 알아야 구하고 찾게 된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이삭도 권력과 힘 앞에서 초라해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아버지 아브라함과 똑같이 자기 아내인 리브가를 누이라고 속인다. 아버지와 똑같은 잘못을 저지른다.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했다면, 하나님의 능력도 믿어야 했다. 자기를 능히 지키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언약을 따라야 했다. 그런데 그는 사망과 죽음의 권세 앞에서 무기력해진 모습을 보인다. 7절,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성도들이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사랑을 알고 있어도,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면 기도하지 않는다. 반면에 능력을 알면 인내하고 기다리고 끝까지 구할 수 있다. 핵심이 무엇인가?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께 쓰임 받은 능력의 사람이다. 그런데 기적같은 역사들을 일으킨 것이, 모세가 능력을 받아서 그런 일을 한 것일까? 모세가 능력을 받아서 된 것이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이다.


그러면 모세는 무엇을 했는가? 모세는 하나님께 구했을 뿐이다. 그가 하나님께 구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나일강의 물을 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이며, 애굽 군대를 몰아내실 수 있는 분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모세의 탁월함이었다. 능력을 아니까 능력을 구하고, 능력을 구하니까 능력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라 다닐 때의 일을 기억해 보라. 어느 날, 엘리야가 ‘하늘로 올려지기 전에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 보라’고 한다. 그러자 엘리사가 유명한 말을 했다. 왕하 2:9절,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이때까지 엘리사는 능력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엘리야가 그것에 대해서 개념을 수정해 준다. 그의 잘못된 요구를 엘리야가 시정해 주었다는 것이다. 왕하 2:10절, “이르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엘리사가 갑절의 능력을 달라고 한 것은 어려운 일, 다시 말하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 대신 무슨 이야기를 전해 주었나?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데려가시는데, 그것을 보느냐 못 보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능력을 받느냐 못 받느냐?”가 아니라, 산 채로 자기를 데려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네가 보느냐 못 보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능력의 근원은 하나님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능력을 ‘보는 것’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아는 것과 보는 것이 핵심이다.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보여져야 한다. 말씀이 보여지고, 능력이 보여지고 알아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기도하고 구하고 찾게 되어 있다. 왜 사람들이 기도하지 못하나? 왜 기도하는 시간과 자리로 찾아 들어가지 못할까? 능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보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보여지고, 말씀이 보여지고, 능력이 보여지고, 믿어지게 되시기 바란다.


3. 하나님의 섭리를 알아야 포기하지 않는다.


이삭은 아비멜렉이 자기에게 와서 하는 말을 듣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을 것이 분명하다. 이삭은 리브가로 인해서 자기가 죽게 될까 두려워했다. 그러나 이삭을 리브가 때문에 자기 생명이 지켜지게 되는 선언을 듣는다. 11절,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 자기 아내 때문에 죽을까 두려워했는데, 오히려 자기 아내로 인해서 생명을 보호받게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가 그런 것이었다. 약속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은, 이삭의 생애를 보호하시는 분이셨다. 그에게 흉년이라는 고난이 들어왔지만, 하나님은 언약대로 그의 인생을 이끌어 가신다. 반드시 약속을 이루시고, 말씀을 성취하시는 분이신 것이다. 이삭이 이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그 다음부터 그의 삶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지게 된다. 다음에 읽을 말씀이지만, 그는 아버지가 팠던 우물을 파기 시작한다. 조용히 하나님께 모든 주권을 맡기고, 아버지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을 따라갔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결국에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축복과 번영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은 합리적이지 않으실 때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합리성보다 기적을 경험했던 사람들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을 사용하실 때가 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실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은 실망하고 있었던 마르다에게 물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다른 사람의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는 것이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들에게 “네가 이것을 믿느냐?”고 물으신다. 다른 사람이 믿는 것이 아니다. ‘네 아내가 믿느냐? 네 부모가 믿느냐? 네 자녀가 믿느냐?’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믿음은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요 11:40절에서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고 하셨다. 이것이 관건이다.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이다. 믿으면 하나님의 살아계신 능력을 보게 되는 것이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