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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막 5:35-43)

  • 작성자 사진: 신애교회
    신애교회
  • 3월 18일
  • 4분 분량

최종 수정일: 7월 4일



오늘 말씀은 질문으로 이제 시작을 하려고 합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는데 예수님이 달리다쿰이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다시 살아났습니다. 달리다쿰은 우리 말로 번역할 때는 ‘소녀야 일어나라’ 라는 뜻입니다. 이 소녀는 12살에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경험을 한 겁니다. 오늘 메시지에서 우리가 정확하게 알아야 되는 지점은 말씀과 믿음의 관계성입니다. 말씀과 믿음의 관계성이 중요합니다. 죽은 자가 살아났다라고 하는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기적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고 누구를 통해서 일어나게 되었느냐를 아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그 기적이 일어나게 된 전제 조건인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탁월한 믿음을 가졌던 영웅들이 있지만 그들의 믿음이 자식들에게 전수되지 못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왜 믿음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듣는 중에 교회에 대해서 부정적인 혹은 목회자에 대해서 성도에 대해서 신앙에 대해서 부정적인 언어를 토해낸 적이 있다면 철저하게 회개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자식들의 믿음이 좋은 방향으로 세워지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떠나서 우상을 숭배했을 때 예배가 타락하고 기도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망하게 하셨습니다. 말씀에서 멀어지니까 똑같이 예배가 탈락하고 올바른 기도의 모습이 사라져 버립니다. 요한복음 5장 38절 말씀에서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않으니까 믿는 자가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너희 속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붙잡아야 되는데 그 말씀을 붙잡지 않았기 때문에 말씀이 이 안에 머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붙잡는 게 핵심이고 말씀을 붙잡는 자가 신앙생활이 잘 할 수 있고 믿음이 세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붙잡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냐면 유명한 주석자인 바클레이는 유대인들이 말씀을 붙잡지 않은 이유로 그들이 성경을 닫힌 마음으로 읽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말씀을 닫힌 마음으로 읽으면 말씀을 붙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설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찾으려고 말씀을 들은 게 아니라 자기의 입장을 지지하기 위한 목적과 논쟁에서 자기의 신앙을 해명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이 자기의 입장을 지지 받거나 자기의 입장을 해명하기 위해 읽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머리로 아는 것과 그 말씀을 붙잡고 순종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머리로 아는 것이 능력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그것이 능력이 되는 것이고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말씀을 붙잡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말씀이 이루어 졌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메시지의 핵심은 바로 말씀을 듣고 살아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5장 41절과 2절에서 예수님이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쿰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내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입니다.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12살이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회당장의 딸이 죽었을 때는 뭐라고 부르냐면 아이라고 불러 아이의 헬라어는 파이디온인데 이 말은 평균 5살 미만의 어린아이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회당장의 딸은 12살입니다. 12살짜리 12살짜리 소녀를 파이비온, 즉 5살 미만의 어린아이라고 부른 이유는 이 회당장의 딸이 잠들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잠자는 어린아이처럼 자기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회당장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는 죽어가는 중이었고, 예수님 만나서 자기 집으로 올 때는 이미 죽은 자였습니다. 자기 스스로 일어나서 행동할 수 없고, 자기 스스로 일어나서 먹을 수 없고, 자기 스스로 일어나서 뭔가를 할 수 없는 그런 상태, 마치 영적인 아기의 상태와 똑같았다는 것입습니다. 이게 당시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의 영적인 수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해당장의 딸을 말할 때에 파이디온이라고 41절까지는 계속해서 이 아이를 말할 때 파이디온이라는 단어를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다가 이 아이가 말씀을 듣고 살아나서 일어나 걸었습니다. 그때 호칭이 달라져서 42절 말씀을 보면 호칭을 우리 말로는 소녀라고 했습니다. 헬라 말로는 코라시온이라고 그랬는데, 코라시온이라고 하는 말은 성숙한 처녀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영적인 아이의 수준에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젖을 먹던 그런 신앙의 수준에서 신령한 것을 먹을 수 있는 수준으로 일어나라는 겁니다. 말씀을 듣고 일어난 자가 되었을 때에 비로소 생활의 필요가 채워지고 육체의 피로가 채워지고 살아갈 수 있는 필요가 공급받더라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채워지고 무엇이 일어나는 것이 우선순위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까? 어린아이의 연약한 믿음 즉 자기 몸 하나도 간수하기 힘든 그런 믿음 그 믿음의 수준에서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수준의 믿음으로 자라나려면 말씀이 인생 안에서 세워져야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인생에서 절대로 무너지면 안 되는 게 말씀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괴롭고 힘든 일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말씀이 여러분 안에 살아 있으면 말씀이 여러분 안에 반석처럼 살아 있으면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지 않고, 기도의 재단이 무너지지 않고, 예배의 재단이 무너지지 않고, 여러분 인생의 삶도 인생의 터전도 무너지지 않게 된다는 것을 꼭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던 여자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면 나을 거라고, 구원받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믿음이고, 그 믿음으로 여자의 몸에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이 그녀를 구원했으니 편안히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회당장의 이야기는 회당장은 유대인으로서 믿음으로가 아니라 율법으로 해야 할 일을 하던 그였습니다. 하지만 말씀에서 그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로서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마가는 말씀을 듣는 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런 이야기도 기록하지 않고 여러분이 만약에 회당장 야이로의 본 모습이었다면 이때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그가 말씀을 듣는 자로 있을 때에 기적이 일어났던가 잠깐 중간을 살펴보면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과 혈루병 앓던 여인 사이에 대화가 오갈 때 말씀을 듣는 자로 있을 때에 인생에 큰 동요가 생길 만한 그 사건이 자기 안으로 침투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말씀을 듣는 자로 주님이 무슨 행위를 하시든지,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간에 그는 말씀을 듣는 자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은 자가 살아나더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말씀에 따르면 말씀이 머물러야 되는데 이 말씀이 머무르도록 여러분이 그 말씀을 듣고 붙잡는 자가 되었을 때 살아나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세워지면 나머지는 다시 세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가난에서도, 질병에서도, 영적인 침체에서도, 절망과 낙심에서도 살아납니다. 말씀이 여러분과 교회안에 살아있다면 말씀이 역사해서 우리 교회가 부흥되고, 가정에 주님의 권능이 임하고 신앙의 반석을 세울 줄로 믿습니다. 이런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나의 입술을 열어 주시고 내 입이 주를  찬양하게 하소서!! 우리가 겪는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희생을 깊이 새기며 희망을 잃지 않고 살게 하소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나의 입술을 열어 주시고 내 입이 주를 찬양하게 하소서!! 우리가 겪는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희생을 깊이 새기며 희망을 잃지 않고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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